<위기의 바다 기회의 바다> ③ 해운산업, 또다시 격랑 속으로...“아무나 할 수 있는 비즈니스 아니다”

글로벌 해운동맹 재편 시작됐는데, HMM 주인찾기 무산
친환경 컨테이너선으로 바꿔야 하는 것도 숙제
정부-국책연구기관-기업-은행 모두 역량 한계 드러내
`긴 불황 짧은 호황' 견딜 수 있는 자금력과 네크워크 필요

윤구현기자 승인 2024.02.23 13:15 | 최종 수정 2024.03.29 13:45 의견 0
HMM 컨테이너선 /HMM


한국해운협회 홈페이지에 가면 인사말, 협회소개 다음으로 `대한민국 해운산업'이라는 항목이 나온다.

`3면이 바다이고 남북이 분단돼 있어 지정학적으로 도서국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에서 "해운사업은 대체불가능한 교역로로서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써있다.

크고 굵은 문자들이다.

눈에 확 띈다.

해운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서일 텐데, 다른 업종이나 기업들의 홈페이지에서는 볼 수 없는 시도다.

글자의 크기나 굵기만큼 중요한 산업이지만 마땅한 대접을 받아오지 못했다는 무언의 항변인 듯 하다.

해운산업은 극적인 부침을 반복해 왔다.

짧은 기간 안에 모두 3차례에 걸친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무역 한국‘의 상징처럼 불렸던 범양상선 한진해운 현대상선 등의 고유명사는 사라졌다.

유일하게 생존한 컨테이너선사인 HMM의 민영화 작업이 최근 무산되면서 해운산업의 향배에 다시 눈길이 쏠리고 있다.

여기에 글로벌 대형 컨테이너선사들의 전략적 이합집산이 다시 시작되면서 우리나라 수출입화물의 99.7%, 원자재의 100%를 운송하는 해운산업에 대한 우려도 다시 커지는 상황이다.

◆ 해운산업 구조조정 적기 놓치나...HMM 재매각 무산

산업은행과 해양진흥공사는 HMM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하림그룹-JKL 파트너스 컨소시엄과 주주간 계약 협상을 진행해 왔지만 지난 2월 6일 결렬을 선언했다.

HMM은 산업은행과 해진공의 관리 체제를 유지하게 됐다.

산업은행과 해진공은 해운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인 만큼 경영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한 반면 하림 측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지분매각 제한의 경우 하림은 재무적 투자자인 JKL파트너스의 매각 제한 기간을 3년으로 줄여달라고 제안했지만 산업은행과 해진공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산업은행과 해진공은 올해와 내년 콜옵션(조기상환 청구권) 행사 시점이 도래하는 1조6800억 원의 영구채를 주식으로 전환할 예정인데, 하림 측은 이를 유예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구채가 주식으로 전환되면 지분율이 희석돼 경영권 확보를 위한 금액이 조 단위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은행과 해진공은 HMM 주가가 오른 상태에서 영구채를 주식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배임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며 거부했다.

이번 협상에서 확인된 점은 △재무적 투자자가 투자금을 금세 뺄 수 없다는 것 △영구채 전환은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HMM 인수 희망자는 가급적 사모펀드(재무적 투자자) 없이 자체 자금으로 도전해야 하고, 영구채 전환에 따른 지분 희석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들이 만들어진 셈이다.

증권가에서 그런 원매자를 찾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는 이유다.

문제는 HMM 주인 찾기가 무산된 가운데 글로벌 해운동맹 재편의 시계가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하림의 재무적·사업적 역량을 놓고 평가했을 때 이번 결렬이 한국 해운산업을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평가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해운동맹 재편기와 HMM 주인찾기 무산이 중첩되면서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건 우리 해운산업이 극심한 부침의 `막장드리마급’ 역사를 겪어 왔기 때문이다.

한진해운 구조조정을 놓고 정부 기업 은행 모두 몸살을 앓았던 2016년 국무회의에 입장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왼쪽)과 임종룡 금융위원장. 한진해운을 살려야 한다는 해양부 장관의 입장과 한진해운의 미온적 자구책 때문에 원칙을 지킬 수 밖에 없었던 금융위원장의 입장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일 잘하기로 정평이 난 두 사람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는 한진해운 경영 상황을 감안할 때 한진해운의 운명은 두 사람의 역할 이상의 통찰과 결단이 요구됐었다는 평가다./연합


◆ 금융 논리에 점철된 해운산업 구조조정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 우리나라 해운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은 크게 3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1984년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 때 66개사에 대한 선사 통폐합이 이뤄졌으며 1997년 외환위기 때에는 부채비율 200% 이하로 맞추라는 가이드라인에 따라 구조조정이 시행됐다.

가장 최근인 3번째는 2009년 해운산업 구조조정에 의해 금융권의 자구노력 요구에 따라 선사들의 자산 매각 등을 통한 채무상환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세계 7위 컨테이너 선사였던 한진해운이 파산했다.

2016년 한진해운 법정관리 신청 이후 한진해운 회생 관련 조사위원인 삼일회계법인은 한진해운을 청산하는 게 존속시키는 것보다 낫다는 내용의 실사보고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이로써 한때 글로벌 7위, 시장점유율 7%에 오르면서 머스크 MSC와 경쟁하던 한진해운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현대증권 매각에 성공한 현대상선(점유율 2.2%)은 살아남았다.

금융논리가 휩쓸고 간 해운산업 구조조정의 결과는 참담했다.

신뢰가 생명인 해운산업에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수출입 물류가 엉키면서 대한민국 경제 전체가 마비됐다.

한진해운 컨테이너선은 기항마저 거부당하는 일이 속출하면서 바다 위에 떠 있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아예 부산으로 되돌아오기까지 하면서 3개월 이상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반면 한진해운보다 경영이 낫다고 할 수 없었던 일본 대만 프랑스의 선사들은 자국의 해운정책 보호 속에서 불황을 견뎠다.

한진해운 파산을 계기로 일본 해운 3사는 컨테이너부문을 합병했으며 중국 1위 2위 선사인 COSCO, CSCL도 합병했다.

이후 글로벌 해운업계는 컨테이너선사들이 이합집산하며 사실상 3각동맹체제로 재편됐다.

MSC와 머스크로 구성된 2M, CMA-CGM, 코스코, 에버그린의 오션얼라이언스(29.1%), 하팍로이드 ONE HMM 양밍으로 구성된 디얼라인스(18.5%) 등이다.

머스크 컨테이너선/머스크/연합


◆ 글로벌 해운동맹 재편

최근 글로벌 물류에서 영향력이 센 머스크와 하팍로이드가 새로운 동맹인 `제미나이 협력'을 내년 2월부터 구성하겠다고 밝히면서 대규모 지각변동의 서막을 올렸다.

HMM이 속해 있는 디얼라이언스에서 가장 덩치가 큰 하팍로이드가 빠져나가면서 동맹의 경쟁력이 크게 흔들리게 됐다.

디얼라이언스에서 하팍로이드(독일)는 유럽 및 아프리카, 남미 지역을 커버해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에 속해 있는 HMM 등은 어떻게 이를 극복해 나갈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여기에 급박한 현안들 속에 가려져 있지만 지구온난화 대응을 위한 친환경선박으로의 교체 역시 해운업계를 짖누르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 삭감을 위해 2030년부터 그린쉬핑 시대로 접어들고, 2050년에는 온실가스 배출을 제로화해야 한다.

다른 말로 연료를 암모니아 LNG 수소 등으로 바꿔야 하고, 그러려면 엔진도 바꿔야 한다.

글로벌 해운산업을 지켜보고 있는 성결대 한종길 교수는 “디얼라이언스에서 하팍로이드가 빠져나가면 물동량이 줄어들고 커버하는 범위가 줄어들면서 규모의 경제, 범위의 경제 모두 저하된다”며 “어떻게 보완해 나갈지 우려된다”고 분석했다.

한 교수는 “머스크와 하팍로이드가 판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라며 “하나 남은 HMM을 살려나갈려면 자금력이 충분한 대기업, 해운업력 20~30년 된 전문기업에서 맡는 게 필수적이다”고 평가했다.

◆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한국의 해운산업

HMM 매각 과정에 온 나라가 들썩거린 이유는 HMM이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에 남은 유일한 컨테이너선사이기 때문이다.

국적 원양선사의 중요성은 국적 원양선사가 없을 경우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자명해 진다.

만약 HMM이 없다면 부산항에 수출입 화물이 몰릴 이유가 없고, 다른 나라의 원양선사들도 부산항에 몰릴 이유가 없어진다.

우리 수출기업은 일본 중국 대만 등 다른 나라 항구로 화물을 보내야 하는데, 시간과 수수료 부담 때문에 경쟁력 악화는 불문가지다.

수출입항구가 없는 일본의 지방기업들이 부산항을 통해 화물을 실어나르면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와 있다.

문제는 글로벌 해운동맹도 재편되고 친환경 선박으로 교체해야 하는 압박도 심한 가운데 HMM의 경쟁력 확대, 우리나라 무역선단의 경쟁력 강화 등 근본적 숙제는 하나도 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을 되돌려 2017년으로 가보면 황당한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

생존 현대상선은 글로벌 해운동맹에서 끝자리라도 얻으려고 뛰어다녔지만 겨우 2M(MSC+머스크)의 `준회원’ 자리에 머물렀다.

회원이 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당시 머스크를 만나러 간 현대상선의 대표들의 업력이 일천했기에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는 후문이다.

정부 은행 국책연구기관 기업 모두 실패방정식만 쓰고 있다는 날카로운 비판도 제기된다.

정부와 국책연구기관은 해운산업 구조조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기간산업인 해운산업을 발전시킬 방안을 아직까지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은행 역시 해운산업의 특성을 외면하고 여전히 대출을 해주고 있는데, 대출 당시의 담당 임원은 실적을 올린 게 되지만 후임자들은 부실대출을 해결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외국 은행들이 해운업에 대출해 주지 않는 것과 차이가 크다.

기업 역시 `10년 불황 1년 호황‘이라는 해운업의 특성을 외면한 채 계열사 보증, 증자 참여 등 `공멸의 길’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한다.

한진해운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셈이다.

◆ 그들만의 리그 `박스클럽‘
글로벌 해운업계서는 오너들의 모임인 `컨테이너 박스 클럽’이 최상위 네트워크 메카니즘이다.이들은 와인 한 잔 놓고 귓속말로 중요 이슈들을 정리하는데, 공정거래 이슈 때문에 문건은 전혀 만들지 않는다.

시간을 또 되돌려 보면 한진해운 파산 때 양대 선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최고경영자는 모두 미망인들이었다.

남편 옆에서 회사 돌아가는 걸 지켜봤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게 네트워크 비즈니스의 특성이다.

금융권에서 활동한 이들이 중용됐지만 족탈불급이었다.

한 교수는 “해운에 관해 20~30년 경험을 갖고 박스클럽에 가서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기업과 인재에게 HMM을 맡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역량이 없다면 돈이라도 많아서 해운업계 불황조차 자금력으로 넘길 수 있는 기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수한 중앙대 교수도 “하팍로이드가 여러번 동맹 탈퇴의 사인을 보냈지만 우리가 캐치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글로벌 동향을 파악하고 전략을 짜내야 하는데, 네크워크 분야에 인재들이 오지 않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우 교수는 “글로벌 동맹 재편기를 맞아 글로벌 네트워크 관리에 집중해야 한다”며 “글로벌 동향을 손금보듯 읽으면서 전략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인재 풀을 만드는데 정부도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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