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적 포경의 결과, 혹등고래가 멸종위기에 몰리면서 유전적 다양성이 상실돼 환경변화 대응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제미나이 그림


포경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혹등고래(humpack Whale)의 유전자에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나왔다.

최근 Science Advanced에 게재된 Humpback whale genomes reflect the increased efficiency of commercial whaling 제하의 논문이 그것이다.

연구는 19세기와 20세기, 폭발 작살과 대량 건조선박(factory ships) 같은 기술적 발전이 포경의 효율성을 극도로 높였다는데 주목했다. 인간은 과거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훨씬 많은 수의 고래를 사냥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연구팀은 이 '포경 효율성의 증가'가 혹등고래의 게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추적했다.

그 결과 연구팀은 게놈에 새겨진 멸종의 기록을 찾아냈다.

우선 유전적 다양성의 급격한 감소했는데, 북대서양에서 1600년대 이전 약 25,000마리였던 개체 수가 1900년경 약 2,600마리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남극해에서는 약 66,000마리에 달했던 거대 집단이 1930년대에는 불과 1,375마리만 남는 수준까지 붕괴했다.

연구팀은 현대 고래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 이 짧은 기간의 학살이 유전적 다양성을 심각하게 파괴했음을 확인했다.

게놈 침식(Genomic Erosion)의 발생도 드러났다.

개체 수가 너무 급격히 줄어들면, 집단 내에서 자연적으로 걸러져야 할 '해로운 유전 변이'가 오히려 축적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남극해 혹등고래 집단에서 특히 약하게 해로운 유전 변이(mildly harmful genetic variation)가 증가한 것이 포착되었다.

이는 포경 기술의 발달로 고래들이 진화적으로 대응할 틈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다.

게놈 침식이 무서운 이유

게놈 침식(Genomic Erosion)이란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든 생물 종의 유전자 풀(Gene pool)이 파괴되면서, 그 종의 생존에 필수적인 유전적 다양성이 영구적으로 손실되고 해로운 변이가 쌓이는 현상을 말한다.

단순히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넘어, 생물 종의 '내면(DNA)'이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게놈 침식이 일어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발생한다.

남획이나 서식지 파괴로 인해 개체 수가 갑자기 줄어들면 살아남은 개체들끼리 번식하다 보니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이 계속 교배하게 된다.

이 때 자연 상태에서는 도태되었어야 할 '약하게 해로운 변이'들이 집단 내에 널리 퍼지고 고착된다.

즉 환경 변화(질병, 기후 변화 등)에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유전적 '카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나타났듯, 게놈 침식은 겉으로 보이는 개체 수가 다시 늘어나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유전자가 단순해지면 새로운 바이러스나 질병이 발생했을 때 집단 전체가 한꺼번에 몰사할 위험이 커진다.

기후 변화로 바다 온도가 변하거나 먹이 사슬이 바뀌어도, 이에 적응할 수 있는 돌연변이가 나타날 확률이 매우 낮아진다.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번식률이 떨어지고, 개체 수가 더 줄어들며, 다시 유전적 결함이 심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미래를 향한 경고

현재 국제적인 보호 노력 덕분에 혹등고래의 개체 수는 다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 논문은 중요한 경고를 던진다.

겉으로 보이는 개체 수는 회복될지 모르나, 유전적 다양성이 이미 훼손된 상태(게놈 침식)이기 때문에 기후 변화나 새로운 질병 같은 미래의 위협에 대응할 능력이 예전보다 훨씬 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기술적 진보가 생태계에 입힌 상처는 단순히 개체 수 회복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는 점을 논문은 시사한다.

요약하자면 인간이 만든 기술로 혹등고래는 순식간에 사라질 뻔했고, 그 고통의 기록은 살아남은 고래들의 DNA 속에 '유전적 결함'이라는 상처로 고스란히 남아 미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얘기다.

윤구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