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왓슨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
DNA 구조를 밝혀냄으로써 현대 생명공학의 기초를 이룬 제임스 왓슨이 7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CSHL)가 발표했다. 1928~2025.
이에 따르면 제임스 왓슨은 과학, 교육, 공공 서비스에 많은 공헌을 했다.
과학자로서,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로잘린드 프랭클린, 모리스 윌킨스, 그리고 킹스 칼리지 런던의 동료들이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DNA 구조를 결정한 것은 생명 과학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왓슨은 크릭, 윌킨스와 함께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왓슨은 또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을,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과학 훈장을 받았으며, 그 외에도 많은 상과 상금을 받았다.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동안 왓슨은 소형 바이러스의 구조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도 수행했다.
미국 하버드에서 왓슨의 연구실은 시드니 브레너가 이끄는 영국 케임브리지의 연구실과 함께 mRNA의 존재를 입증했다.
그의 연구실은 또한 유전자 발현을 제어하는 중요한 박테리아 단백질을 발견했고 mRNA가 단백질로 번역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왓슨은 하버드에서 작가로서 두 권의 책을 집필했는데, 이 두 권은 베스트셀러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다. 1965년에 출간된 교과서 『유전자의 분자생물학』 (7판, 2020년)은 과학 교과서의 본질을 바꾸었고, 그 스타일은 널리 모방되었다.
『이중나선』 (1968년)은 출간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DNA 구조 규명으로 이어진 사건들에 대한 왓슨의 설명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다.
공적인 분야에서 왓슨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 초기 몇 년 동안 과학자들의 참여를 이끌고 정치인들의 자금 지원을 이끌어내며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왓슨은 1947년 지도교수 살바도르 루리아와 함께 대학원생으로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에 들어오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루리아는 막스 델브룩과 함께 전설적인 파지 강좌를 가르치고 있었다. 왓슨은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에 여러 차례 소속됐는데, 특히 1953년 연례 심포지엄에서 DNA 이중나선 구조를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 발표했다.
왓슨은 1968년에 엘리자베스(리즈) 루이스와 결혼하여 평생 CSHL 캠퍼스에서 함께 살았다. 왓슨과 리즈는 루퍼스와 던컨, 두 아들을 뒀다.
1969년, 왓슨은 CSHL에서 암, 특히 암을 유발하는 DNA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이러한 바이러스 연구는 노벨상을 수상한 RNA 스플라이싱을 포함하여 중요한 생물학적 과정에 대한 많은 근본적인 발견으로 이어졌다. 왓슨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CSHL 국립암연구소 지정 암센터의 초대 소장을 역임했다.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의 가장 중요한 업적인 DNA 이중 나선 구조의 발견은 현대 생명과학의 분자생물학 시대를 열었으며, 이후 모든 생명과학 연구와 생명공학 기술 발전의 근본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기본원리 이해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이 1953년에 밝혀낸 DNA의 이중 나선 구조는 유전 정보의 저장과 복제 방식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공했다.
핵염기 서열(A, T, G, C)이 유전 암호를 저장하는 방식이 밝혀졌다.
이중 나선이 풀리고 각 가닥이 새로운 상보적 가닥을 만드는 방식(반보존적 복제)이 가능함을 구조적으로 제시하여, 유전의 메커니즘이 분자 수준에서 이해됐다.
DNA 구조 규명은 생명 현상을 화학 및 물리학적 관점에서 환원하여 설명하는 분자생물학을 주류 학문으로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DNA 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유전 정보가 DNA→RNA →단백질로 흐른다는 분자생물학의 중심 원리(Central Dogma) 정립에 기여했다.
DNA를 조작하고 재조합할 수 있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Recombinant DNA technology), 유전자 가위(CRISPR) 등의 모든 생명공학 기술이 DNA의 분자 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발전했다.
왓슨은 인간의 전체 유전 정보를 해독하려는 국제 협력 프로젝트인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88~1992년 초대 소장 역임).
이는 모든 유전 정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유전체학 시대를 열었으며, 수많은 질병의 유전적 원인을 밝히고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의학의 혁신
DNA 구조와 염기 서열에 대한 지식은 현대 의학과 사회 전반에 걸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개인의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여 질병 위험도를 예측하고, 유전적 특성에 맞는 맞춤형 치료제나 투약법을 개발하는 근거가 됐다.
유전자 결함으로 인한 질병을 치료하는 유전자 치료의 기반이 되었으며, 유전 질환을 진단하는 분자 진단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DNA 지문 분석을 통해 범죄 수사 및 친자 확인 등 법의학 분야에 혁신적인 도구를 제공했다.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 발견은 단순한 학문적 성과를 넘어, 생명 현상의 근본적인 비밀을 해독하여 인류의 삶과 의학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20세기 과학의 결정적 순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DNA 발견 기여도 논란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이중 나선 구조를 규명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이 과정에서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결정적인 기여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다.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이 촬영한 DNA X선 회절 사진(Photo 51)과 그녀의 연구 노트를 그녀의 동의나 충분한 인지 없이 동료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를 통해 입수하여 구조 모델을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활용했다.
왓슨이 1968년에 쓴 회고록 《이중 나선(The Double Helix)》에서 프랭클린을 "로지(Rosy)"라고 부르며 그녀의 태도와 외모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공헌을 경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프랭클린은 195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노벨상은 사망자에게 수여되지 않음). 오늘날 프랭클린은 과학계에서 기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여성 과학자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인종차별 및 우생학적 발언 논란
왓슨은 생물학계에서 거의 퇴출당하는 결과를 낳은 여러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심각한 비난에 직면했다.
왓슨은 2007년 영국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프리카계 흑인과 백인의 지적 능력이 유전적으로 동일하지 않다고 믿으며, 서구 사회의 아프리카 관련 정책이 이들이 동등하다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그는 오랫동안 몸담았던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의 소장직에서 사퇴하고 명예직에서도 정직됐다.
2019년 다큐멘터리에서 그의 견해가 바뀌었는지 질문받았을 때 "전혀 아니다"라고 답하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CSHL은 그의 발언이 "과학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며 남아있던 모든 명예직(명예교수 등)을 박탈했다.
그는 이 외에도 동성애자, 여성, 과체중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하적이거나 물의를 일으킬 만한 발언을 여러 차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논란으로 인해 왓슨은 학계에서 고립되었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2014년에는 생존 노벨상 수상자 중 최초로 자신의 노벨상 메달을 경매에 내놓기까지 했다.
윤구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