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강남 교보타워에서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이 자신의 경영에세이 ‘인생의 파도를 넘는 법’ 출간 기념 간담회를 열고, 자신이 걸어온 길 등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동원그룹>
김재철 동원그룹·한국투자금융지주 창업주가 새 책 `인생의 파도를 넘는 법'을 들고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책 소개에서 김재철 명예회장은 자신을 `현업 드리머(dreamer) 겸 지속가능 챌린저(challenger)'라고 썼다.
책에서 김 명예회장이 젊은이들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를 암시하는 표현들이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한 키워드는 세 가지, 도전과 열정 그리고 호기심이다. 나는 세상에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늘 궁금했고 질문했고 시도했고 도전했다. 이 책은 내가 품어온 호기심과 도전의 질문들이자 열정과 성장의 답변들이다. 꿈을 품고 있거나 그 꿈을 이루고픈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길은 어떻게 찾아지는가
김 명예회장은 농사짓는 집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까지 바닷가 근처도 가본 적 없었지만 바다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된 계기는 한 선생님의 말씀이었다고 회고한다.
성적이 좋아 이미 서울대 합격이 예상됐던 그였지만 서울대 출신 선생님이 "서울대를 나왔지만 지금 너희들과 매일 입씨름하고 있다. 내가 너희 나이라면 바다 계통 학교로 가 새로운 삶을 찾아 보겠어"라고 했던 게 미래를 고민하던 고등학생 김 명예회장의 가슴에 꽂힌 것이다.
가난한 소작농의 11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일을 돕고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던 그는 `바다'라는 '새로운 길'에 뜻을 두게 됐고, 부산수산대 어로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평탄한 길보다 험한 길을 궁금하고 도전하고자 하는 기질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우연히 신문 기사에서 국내 첫 원양어선이 출항한다는 기사를 보고 무작정 선원으로 채용해 달라고 요청한 것도 미지의 먼바다에서 꿈을 이뤄보고자 하는 도전 정신의 연장이었다.
신참자를 거절한 원양선사에 무급 조건에다 `설령 바다에서 죽어도 회사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입사, 1958년 마침내 원양어선에 오르는데 성공한다.
세상이 정해놓은 정답보다는 내가 답을 만들 수 있는 곳을 택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치 여행자의 나침반처럼 `새로운 길'로 인도한 것이다.
열정은 처음부터 생기지 않는다
처음 탄 배지만 허드렛일만 도맡은 게 아니었다. 위성항법장치가 없어 해와 별을 보고 위치를 계산해야 했는데, 영어로 돼 있었다. 대학에서 영어를 배운지라 위치 계산이라는 중요한 일까지 맡았다.
고기도 잘 잡았다. 고기를 잡으면 배를 갈라 뭘 먹었는지 살펴봤다. 그 먹이가 많은 곳에 참치들이 모여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친듯 일하고 열심히 공부한 이유는 뭔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데 있었던 것 같다고 김 명예회장은 회고한다. `대학생 신분을 포기하고 뱃사람으로 시작했으니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집중상태로 이끌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그 다음 서술이다.
"처음부터 열정이 넘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열정은 마음먹는다고 생기지 않는다. 자신을 다른 사람, 중요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힘을 다하면 열정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게 무급 실습 항해사 경험이 준 교훈이다"
MZ세대의 거의 대부분이 겪고 있는 `뭘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고민에 대한 김 명예회장의 답인 셈이다.
포기도 능력이다
김 명예회장의 책이 독특한 점은 스스로의 실패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카메라 사업 등 실퍠한 사업에 대해 솔직하게 원인을 되돌아본다.
일본도 캐논 미눌타 등 중견기업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걸 고려해 국내서도 대기업이 진출하지 않는다면 승산이 있겠다 싶어 뛰어들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대기업이 들어오고 자금 공세를 당하면서 동원의 설자리를 줄어갔다. 자본금 30억짜리 회사에 돌아온 건 70억 손실이었다. 그 때 남은 교훈은 `준비에 실패한 것이 실패를 준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때 나름의 사업적 원칙이 확립됐는데,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이 일이 실패해도 본체가 망가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의 가이드라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마지막 피난처는 있어야 한다.
풍랑이 일 때 진짜 항해가 시작된다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다 강력한 태풍이 불면 사람들은 대부분 선원들이 파도를 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원들은 파도를 보지 않고 선장의 얼굴을 본다.
선장의 표정에서 자신감과 담담함이 보이면 선장의 지시에 따라 단결하여 폭풍권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장의 얼굴에 당혹감과 불안함이 보이면 선원들의 불안은 더욱 커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리더의 어원에는 앞에서 먼저 바람을 맞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김 명예회장은 "자녀들이나 손자들에게도 항상 희생과 배려 없이 신뢰를 바라는 것은 멍청한 욕심"이라고 강조한다는 것이다.
워라벨에 대해서도 김 명예회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며 "다만 분명한 건 본인이 열심히 해서 올라가겠다고 한 사람과 적당히 한 사람은 굉장한 차이가 난다"고 조언한다.
그는 "어느쪽이 옳고 그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것이 더 보람있는 삶인지 스스로가 판단할 문제"라고 정리한다.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좋은 인간관계'
김 명예회장은 "성공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적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 첫번째가 인간관계"라고 조언한다.
오랜 기간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봐 왔는데, 똑똑한 사람보다 인간관계 좋은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더라는 것이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주위를 배려하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동료들의 부탁을 항상 진지하게 들어주고 불편한 일을 먼저 나서서 하고, 양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주변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고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한다. 이를 `길동무가 되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김 명예회장은 자식들이나 회사 간부들에게도 "이 세상에 나와서 남에게 신세 진 거 보다 조금이라도 더 갚고 간다고 생각하고 살아라"고 말한다며 ""다른 사람이 너를 길동무로 삼고 싶은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강조한다.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로서 사회지도자로서, 그리고 이제는 친절한 할아버지로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잔잔하지만 바다만큼 깊다.
윤구현기자